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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_기억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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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노트 오랜 시간 다큐멘터리를 편집해오면서, 다들 진로 준비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혼자 뒤쳐져서 나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불안했습니다. 내가 너무 미련을 못 버리고 이미 어쩔 수 없이 끝나버린 일에 매달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요. 그런 저를 잡아주었던 생각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며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계속해서 돌아보고 반추하면서 그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왔던 이야기를, 의미들을 발견해서 이야기로 해내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요. 촬영이 끝나고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망했다’는 비관이고 ‘그래도 잘했다’는 낙관이고,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건 ‘그래도 해 보자.’ 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다큐멘터리를 ..
8/30 미류님 인터뷰_이정겸 가장 마지막 인터뷰였다. 대중교통으로 가기가 쉽지 않아, 학교 끝나고삼삼오오 모여 택시 두 대를 잡아타고 출발했다. 가는 길에 조용한 택시 안에서, 곤히 잠든 친구 너머로 한강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던 것이 생각난다. 미류작가님과의 인터뷰는 내가 다큐 촬영 중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가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건은 발생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연히 우리는 이를 잊어버리므로 기억은 그 사람들과 함께 가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모든 도덕은 사실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내게 세월호는 일말의 책임감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11살의 내가 왜 세월호 사건에 책임 의식..
8/27 김성묵님 인터뷰_이지행 사전미팅 때부터 김성묵 님을 찾아뵙는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섭외를 맡았던 분이어서, 그래서 더 전부터 대화를 나누어서인지는 몰라도편치 않은 마음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른 인터뷰들을 진행해왔다는 뜻이 아니다. 세월호에서 마지막으로 생존하신 분. 그 배에서 마지막으로 나오셨을 분을 만나는 길이어서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다. 김성묵 님의 인터뷰에는 분노가 있었다. 짜증이나 화처럼 사사롭고 가벼운 그런 것 말고 분노가 있었다. 그간 진상규명 하나를 위해 해오신 일이 모두 헛짓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 사실은 안타까움, 비통함, 누군가를 향한 화, 결국 다시 분노가 있었다. 김성묵 님의 삶은 무지 쉽지 않은 삶같아 보였다. 쉽지 않은 삶...”죽지 못해 살아내는 살인자입니다”라는 김성묵 님..
8/20 정혜윤 PD님 인터뷰_윤선우 촬영장소는 방송국이었다. 현장 체험학습까지 내고 갔었던 촬영이었고, 무거운 장비들을 이고 먼 길을 떠나야 했기에, 도착했을 때 모두 지쳐있었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방송국 로비 구석에서 어수선하게 서 있더니, PD님께서 우리를 맞이해주시러 내려오셨다. 둥그렇고 넓적 한 모자와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입으신 모습이 인터넷에서 보시던 모습과 똑같아 한눈에 알아뵐 수 있었다. 스튜디오에 들어서서 인터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세팅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대화'를 이끌어주셨고, 인터뷰할 때도 부족한 질문이었지만 말씀마다 신중하게 신경 써주시면서 답변해주셨다. 질문을 받고 대답을 생각해내신 거라기보다는, 이런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평소에 본인이 생각하시던 견해와 겪으셨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대화하시는 방식도 듣는..
8/18 재강어머님 인터뷰_최주희 처음으로 단원고 희생자 학생의 부모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나는 사람들이 세월호를 슬픔으로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행복한 마음으로, 웃음으로 아이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물론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와 내가 받아들인 의미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앞으로 세월호를 웃음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8/12 약전 읽기_차주엽 기억교실을 갔을 때, 너무 몰랐다. 그냥 무작정 수많은 죽음 앞에 슬퍼하기만 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 앞에 힘이 빠져 울기도 했다. 한분 한분 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생각지도 못할 수만큼의 죽음 앞에 고통 앞에서 무너지는 것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기로 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약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어떤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간략하게 적은 기록. 어렸을 적 위인전도 읽지 않은 나에게 생소한 이야기였다. 책을 펴자마자 알았다. 우리는 수많은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하였는가. 책을 펴자마자 거의 다 읽었던 것 같다. 모두 비슷했다. 부모의 사랑스러운 자식이었다. 나와 같이. 나에게 또 한 번 상기시켜준다. 그들은 특별하지 않다. 모두 평범하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다시..
8/9 가족극단 노란리본_정명승 극단. 극단이라는 이름은 내게 왜인지 모르게 떠돌아다니며 아무 관객이 없어도 연극을 하고 또 어딘가로 떠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가족 협의회에 처음 간 것이 아님에도,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뭘 느끼고 할 틈 없이 정신없었다. 다시 한번 가족협의회에 도착했을 때, 맑고 더운 날과 반대로 쓸쓸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장소에 기운 같은 게 있다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다가 처음으로 ‘어? 좀 그런 게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노래를 부르고 계신 대강당에 들어서자, 옆 벽면에 학생들의 사진이 쭉 쭉 붙어있었다.이전 기억교실에서 봤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명 한 명 더 기억하지 못하는 게 미안했다. 누구한테 미안한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8/2 인천 추모관_송현서 추모관을 가는 길에 택시를 탔다. 기사님께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으로 가달라고 말씀드렸을 때 여기에 그런 곳이 있냐며 놀라셨던 장면이 떠오른다. 이곳에서 택시 운전을 몇 년이나 했는데 세월호 추모관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고 하셨다. 사람들에게 세월호 추모관이 잊혀진다는건 세월호가 잊혀지는 것과 다름없기에, 씁쓸함이 마음 속에 맴돌았다. 어쩜... 추모관에서 보고 들었던 세월호 사건 당시의 이야기들, 일반인 희생자분들의 이야기들에 대해서 느낀 감정들이 수없이 많았음에도 나는 그저 침묵만 유지했던 것 같다. 말을 꺼내고 싶지만 슬픈 감정에 휩싸여 제대로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이곳 오기 전에 우연히 라는 만화를 읽었었다. 만화에 등장하신 그 생존자분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셔야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