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단원고 희생자 학생의 부모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나는 사람들이 세월호를 슬픔으로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행복한 마음으로, 웃음으로 아이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물론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와 내가 받아들인 의미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앞으로 세월호를 웃음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기억교실을 갔을 때, 너무 몰랐다. 그냥 무작정 수많은 죽음 앞에 슬퍼하기만 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 앞에 힘이 빠져 울기도 했다. 한분 한분 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생각지도 못할 수만큼의 죽음 앞에 고통 앞에서 무너지는 것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기로 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약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어떤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간략하게 적은 기록. 어렸을 적 위인전도 읽지 않은 나에게 생소한 이야기였다. 책을 펴자마자 알았다. 우리는 수많은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하였는가. 책을 펴자마자 거의 다 읽었던 것 같다. 모두 비슷했다. 부모의 사랑스러운 자식이었다. 나와 같이. 나에게 또 한 번 상기시켜준다. 그들은 특별하지 않다. 모두 평범하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극단. 극단이라는 이름은 내게 왜인지 모르게 떠돌아다니며 아무 관객이 없어도 연극을 하고 또 어딘가로 떠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가족 협의회에 처음 간 것이 아님에도,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뭘 느끼고 할 틈 없이 정신없었다. 다시 한번 가족협의회에 도착했을 때, 맑고 더운 날과 반대로 쓸쓸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장소에 기운 같은 게 있다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다가 처음으로 ‘어? 좀 그런 게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노래를 부르고 계신 대강당에 들어서자, 옆 벽면에 학생들의 사진이 쭉 쭉 붙어있었다.이전 기억교실에서 봤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명 한 명 더 기억하지 못하는 게 미안했다. 누구한테 미안한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강당에 들어설 때 노래를 부르고 계셨다. 조용히 카메라를 세팅하고 나니 노래가 끝나고 다들 얘기를 하시고 계셨다. 모든 인터뷰가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 가지는 기억난다. 연극이 집에서 나오지 못하던 분들이 다시 나올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추모관을 가는 길에 택시를 탔다. 기사님께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으로 가달라고 말씀드렸을 때 여기에 그런 곳이 있냐며 놀라셨던 장면이 떠오른다. 이곳에서 택시 운전을 몇 년이나 했는데 세월호 추모관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고 하셨다. 사람들에게 세월호 추모관이 잊혀진다는건 세월호가 잊혀지는 것과 다름없기에, 씁쓸함이 마음 속에 맴돌았다. 어쩜... 추모관에서 보고 들었던 세월호 사건 당시의 이야기들, 일반인 희생자분들의 이야기들에 대해서
느낀 감정들이 수없이 많았음에도 나는 그저 침묵만 유지했던 것 같다. 말을 꺼내고 싶지만 슬픈 감정에 휩싸여 제대로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이곳 오기 전에 우연히 <홀 :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라는 만화를 읽었었다. 만화에 등장하신 그 생존자분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셔야 했는지한 걸음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에 잠깐 비가 있었지만, 날이 좋았다. 어디에 계시든 항상 잘 지내셨음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날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에 실수로 우산을 놓고 왔었다. 이 우산이 희생자들에게 내리는 비를 막아주는 우산이 되어줬으면.... 싶었다. 매일 좋은 날만 가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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