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대로 적어보자면, 아마 처음으로 갔던 기억 교실은 촬영을 허가 받지 않고 그저 방문만 했던 날이었다. 기억 교실을 보고 느꼈던 첫 감정은 알 수 없는그리움이었다. 옮겨진 모습이라서 학교라는 공간의 모습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벽과 바닥, 천장의 에어컨까지 그때의 모습이 너무 생생하게 멈춰있었다. 교실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실의 칠판, 책상, 의자. 모든 게 우리가 알던 그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문 너머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 웃음소리가 존재하지 않고, 또 웃음이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린 교실의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냥 그렇게 아파하며 한 명 한 명 얼굴을 마음속에 새기며 교실을 바쁘게 둘러보고 나왔다.
촬영을 위해 또다시 기억 교실을 방문했을 때에는 공간에 묻어 있는 그 날의 향기를 열심히 찾아봤다. 반의 벽면에 붙어있는 큰 캘린더에 친구들의 생일과 학교 행사와 더불어 ‘수학여행’이 써져있었다. 옆에는 큰 하트도 붙어있었는데어떤 마음으로 그 글씨를 썼을지 너무나 잘 알 것만 같아서 더 마음이 저려오기도 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건 교무실, 선생님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수학여행을 위한 ‘개인정보 동의서’ 였다. 그 안에는 많은 학생들의 이름과 동의 칸에 쳐져 있는 동그라미들이 존재했다. 그게 얼마나 미워 보였는지 모른다. 그것만 없었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따라가지는 않았을텐데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단원고에 방문했을 때에 가장 먼저 본 것은 아스팔트에 거의 지워져 가는 희미한 노란 리본 그림이었다. 그만큼 지나간 세월도 다시 한번 느꼈다. 단원고를 들어가기 전에 어머님을 만나 설명을 들으며 단원고를 둘러봤는데, 그날 그곳의 기억을 말씀해주시는 어머님께 너무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배웅했던 운동장 이 야기를 해주실 때에는 마치 그 장면이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설명을 듣는 우리야 그저 그렇게 상상을 하지만 어머님은 실제로 있었던 얼마나 아팠을 기억을 저렇게 담담하게 이야기 해주실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머님이 말해주시길 단원고가 유가족들을,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그리 마주 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의 추모공간이자 조형물 뒤편에 학교를 빠져나가는 작은 계단이 있는데, 아마도 학교가 좋아하지 않으니 눈을 피해 그곳으로 자주 드나드셨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학교는 학생들의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장해야 하는 의무도 있지만, 그렇다고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공간이 주는 그리움과 아픔, 그 사실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팽목항에서 올라오는 길에 4.16연대 자원활동가 카톡방이 울렸다. 서울시에서 광화문 기억공간 강제 철거를 위해 인력을 보냈다는(관련 발표를 한다며 모이게 해 놓고는, 뒤로는 광화문으로 트럭을 보냈다.) 연락이었다. 아무래도 각별한곳이었다. 처음 행동을 시작한 곳이자, 수많은사람들을 만나고 또 배웠던 곳.
나의 사춘기가 서려 있는 공간이었다.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돌아가며 피켓팅도 하고, 청와대 청원도 했는데. 7월 26일이 서울시가 고지한 철거시한이라는 이야길 듣고, 가방을 챙겨 서울로 갔다. 무슨 일이 안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 아빠한텐 그렇게이야기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정말 너무힘들 거 같아. 못 참을 거 같아.”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셨다.밤 9시에,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해보니 11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고, 극우 유튜버가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한쪽은 벽을 무너뜨리려, 다른 한쪽은 그걸 막아서고 있었다. 틈을 찾아 겨우 폴리스라인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깜깜했다.
빛이라곤 저기 밖 유튜버들이 쏘아대는 조명 뿐. 아마 찾아보면 내 모습도 찍혀 있지 않을까. 유튜브로 실시간 생중계를 하며 ‘저 사람들 좀 보라’며 조롱하고,감염병 예방법을 위반했다 며 잡아가라 소리를 질렀다. “왜 자냐”, “지금이 잘때냐”의 조롱 섞인 말들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말을 들었다.
그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었던 분은 노오란 머리를 하고 계신 순범 어머님이었다. “팬이에요.”라고 이야길 하니 어머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저기 가서 앉아 쉬자며 자리를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무수한 음료와 빵의 세례.... 계속 유족분들이 ‘자라, 자라....’ 하 셨지만 그날 밤 잠을 못잤던 건 아마 배불러서였을 거다.
그날과 다음날 광화문에서 주로 했던 일은 ‘유튜버와 기자 막기’였는 데, 찍어서 비난하고 조롱하는 유튜버들이 카메라를 들이밀 때 피켓으로 재빨리 막는 일이었다. 유족분들이 기자들이 마구 촬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야기하셨고, 활동가들이랑 같이 돌아가며 촬영하려는 기자들을 막았다. 확성기를 대고 소리치고벽을 무너뜨리려 하면 재빨리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처세술도 익혔다. 우재 아버님도 뵈었는데, “넌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냐. 옷 없냐?” 하시면서 얼음팩을 주셨다. 아, 진짜 더웠는데. 아, 츤데레의 정석이시다.
광화문 기억공간의 강제철거는 이뤄지지 않았다. 밤새 지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의원 몇명이 방문했었는데, 시의회 건물 안에 임시로 자리를 마련해주기로 했다. 광화문은 어쨌든 공사를 해야 하니. 광화문 기억공간 보존 투쟁은 그렇게 마무리됐고, 금요일 서울시의회 1 층으로 임시이전, 11월까지 운영되다 시의회 앞 자리를 마련해 건물 밖에 자리를 잡아 운영하고 있다.
아래의 글은 4.16재단에서 주최한 제1회 세월호 독서감상문 공모전에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를 읽고 쓴 글인데, 이날의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 돌아보니 뭐 이렇게 썼나 싶은데, 감사히도 장려상을 주셨다. 영화가 상영돼야 비로소 그 목적을 달성하듯, 글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함께 싣는다.

나는 나다.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서로가 될 수 없음에, 내 가 온전히 타인을 위한 삶을 살 수 없음이 때로는 참을 수 없게 고통스 럽다. 우리는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나. 아무리 공감하고 싶어도, 같이 느끼고 울어도 나는 결코 유가족이 될 수 없었다.
"저 사람들 저기서 내보내면 나도 나갈게. 아, 체포하시라고요." 확성기를 단 차 한 대가 기억공간 옆을 버티고 서서 무수한 말들을 내뱉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말. 말이 아닌 말. 경찰은 경고 방송을 했다. "차 빼세요. 차. 3회 경고 후 불응 시 강제 견인 조치 하겠습니다." 남자는 계속해서 확성기로 소리를 질렀다. 경찰도 따라 이야기했다. "3회 경고 불응 시 강제 견인 조치 하겠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확성기로 소리를 질렀다. 경찰도 따라 이야기했다. "3회 경고 불응 시 강제 견인 조치 하겠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확성기로 소리를 질렀다. 경찰도 따라 이야기했다. "3회 경고 불응 시 강제 견인 조치 하겠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확성기로 소리 질렀다. 경찰도 따라 이야기했다. ...폴리스 라인 안에서, 벽을 붙잡고, 간절히 간절히 바랐다. 제발 그만해 주세요. 유족분들이 고스란히 듣고 계시잖아요. 왜, 왜 그러는 거예요. 도대체 어떤 잘못을 했길래. 이 말들을 그저 듣고 있어야만 하는지. 그저 서울 시의 기억공간 일방적 철거에 슬퍼하고 반대하는 중이었다. 같이 있던 친구가 등을 토닥여 줬다. 가까스로 울음을 삼켰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아니 나갈게요. 나간다니까. 저기 저 사람들도 다 같이 연행하 시라고요." 경찰은 계속해서 따라 이야기했다. "3회 경고 불응 시 강제 견인 조치 하겠습니다." 다시 확성기 소리와 경찰의 경고 방송....
그렇게 잔인한 세상을, 아니 세상이 그렇게 잔인하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제대로 슬퍼할 수조차 없었다. 누군가는 무작정 카메라와 플래시를 디밀었다. 누군가는 돈 이야기부터 꺼냈다.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무작정 나섰던 길은 얼마 못 가 경찰들에 저지 당했었다. 사람들은 그만하자 했다. 이윽고 누군가는 시체팔이라며 조롱했다. 민중의 지팡이는 충돌을 막을 뿐이었다. 상처받은 이들을 보호 해주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을 살았고, 몰랐고, 지나쳤다. 그 수많은 순간을. 유가족분들은 홀로. 무수한 모욕과 비난을. 맞아왔고 버티고 있었다. 이미 세상은 자식을 앗아간 끔찍한 세상이었고,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그 하루를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울어버린 나를, 어머님과 아버님들이 안아주고 달래 주셨었다. 나는 그 삶을 바라봐 왔었다. 기사를 통해 접하고 영상을 통해 보며, 여기 있는 나와 저기 있는 사람들. 고된 삶, 좌절스러운 상황. 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나 살기도 바빴었다. 시연 어머님 말씀이 맞다. '그 사람들은 내일이라도 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인데 우리는 아니잖아요.' 나는 언제든 하기 싫으면 그만둘 수 있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하고 울어도 그 마음을 미처 다 알 수 없다.
세상이 잔인한 건 내가 온전히 그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잘 모르기때문에. 남이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말하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서서 충돌만막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의 죽음은 슬프지만 내 죽음이 아니었기에.
누군가는 죽었어도 나는 삶을 살아가야 했기에.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결코 겪기 전까지 그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연대 활동가여란님과 그런 이야길 했다. '이 책만 읽어도 사람들이 그런 말은 안 할 텐데요.' 세상은 생각보다 더 잔인 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순범 어머님께 물었다. 어떻게 안 우실 수 있냐고. 저 소리들을 어떻게 가만히 듣고 계시냐고. 가만히 토닥여 주시다가, 휴지와 물을 주시면서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하셨다. "더 많은 것들 더 무수한 것들도 겪어 봤어. 나는 안 울 거야. 언제 울 거냐면, 안전한 세상이 됐을 때. 다시는 이런 참사가 안 일어날 때. 그때까지 안 울었다가 그때 다 울 거야." 그리고 우연히 본 영상에서 울고 계신 모습을 봤다. 가만히 쭈그려 앉으셔서 조용히,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웬만한 일에는 눈물이 안 날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리셨던 거다. '눈물이 마르도록.' 강해졌다고 표현하고 싶지 않다. 강해진 게 아니다. 잔인한 세상이 눈물길을 막 아 버렸다. 세상은 이미 자식을 앗아간, 끔찍이도 잔인한 세상이었다. 나는 그걸 미처 다 알지 못했다.

누구는 내게 세상은 원래 그렇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산다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어디선가 그랬다. 그런 순응이 세상을 더 잔인하게 한다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홀로 내버려 둔다고. 자신은 포기했다며 괴로워하는 씨랜드 참사 유가족에게 예은 아버님은 이야기한다.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때 누군가 와 주었다면 좀 더 버티지 않았겠습니까."
누군가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내일의 세상은 오늘보다 조금 덜 잔인하면 좋겠다. 어머님들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댔다. 일어나선 안 된다고. 다른 사람들은 이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을 마주했다. 이틀간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냈던 사람들. 집에 돌아가는 길, 등과 어깨를 맞대고 서서 쓰러지지 않도록 틈틈이 서 있는 사람들. 이렇게, 서로가 맞대어 서서 어깨를 내어주고, 포기하지 않도록 쓰러지지 않도록. 아파하는 누군가를 내버려 둔 채 나만의 삶을 살아가지는 않길.
홀로 남아 있는 그곳에서 유가족은 다른 이에게만은 부디 이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해결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와 같은 아픔을 더이상 다른 사람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거예요. 웃을 때도 있겠지만 평생을 울어야 돼요. 그 쓰리고 가슴 아픈 일을 또다른 누군가도 겪어야 하나요? 그러지 말자 이거죠. 우리가 “같이 해주세요”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같이 해야 하는데 덕을 드러내지 못한 교회들, 보듬어주지 않는 사람들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해요. 우리와 같은 아픔을 더이상 다른 사람은 겪지 않게 해달라고. 사람들에게 골고루 제대로 된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창비

기억의 숲은 한산했다. 우리 팀만 그 숲에 있었다. 기억의 숲이라는 이름과는달리 기억하기 위해 방문한 사람들이 우리밖에 없었던 것이 조금 허전하기도했다. 숲에 들어가면 빼곡하게 노란 은행나무 300여 그루가 있다. 나무들 사이에는 회색 광이 나는 조형물이 있었는데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제서야 기억하기 위한 발걸음이 우리만은 아니었음을 느꼈다.
노란은행나무 잎이 매년 자라나 주는 것에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매년 기억할 수 있도록 시들지 않고 자라나 주어 고마웠다. 은행나무 잎 말고도 주변에 푸른 잔디들과 빨간 열매들, 무지 더운 날에 솔솔 불었던 바람까지. 바다에 가라앉은 그들이 우리를 찾아 와준 느낌이었다. 팀원들 모두 한참을 숲에 머물렀다.
가만히 앉아 숲을 그대로 느낀 팀원들과 열심히 셔터를 누르며 이 숲 또한 기억하려는 팀원들. 모두 같은 마음으로 숲을 걸었을 것이다.
팽목항을 방문했다. 가는 차에선 시끌벅적하기보단 모두 조금 차분해진 분위기였다. 차에서 내려 팽목항 길에 올랐다. 저 멀리에 있는 등대를 옆으로, 길 하단에 쭉 시민들이 그리고 써준 벽돌화들이 있었다. 다큐를 찍으면서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우리밖에 없을까 봐 가끔 두려 울 때가 있다. 벽돌화들에 그려진 그림들과글을 보며 함께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에 안심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등대까지꽤나 긴 길을 벽 돌화들이 묵직하게 지키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기억을 걷는 듯했다.
길 난간을 따라 매달아져 있는 리본들이 쎈 바람에 쉬지 않고 흔들렸다.난간 너머에는 너무 많은 걸 삼켜버린 ‘그 바다’가 눈치 없이 파도 치고 있었다.바다가 미워지는 날이었다. 아주아주 신중한 걸음으로 등대까지 갔다.등대에 도착해서는 떨리는 마음들이 느껴졌다. 밤이 되면 등대의 빛을 보고 얼른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들이 고스란히 내 마음에 닿았다. 우재 아버님을 만나러등대 길을 나서는 걸음도 최대한 느리게 걸으며 기억의 흔적들을 느끼려 했다.
우재 아버님이 계신 컨테이너에 들어가기 전, 무지 긴장되었다. 솔직한 마음을적어 보자면 우재 아버님을 어떤 마음으로, 어떤 말로, 어떤 모양새로 뵈어야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세월호를 생각하면 안타까움, 분노, 슬픔의 감정들이 마구 떠오르는데 우재 아버님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그 감정들을 감당하시고 그 감정들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셨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나도 마찬가지로 그런 감정들을 품은 사람으로서 우재 아버님을 뵈어도 되는 것인지 스스로 의심이 들었다. 시간을 길게 끌 수 없었기에 복잡한 마음으로컨테이너에 들어갔다. 길게 놓여있는 식탁 위로 예쁘게 깎인 접시 위 배들과자리마다 놓여있는 비타오백 음료수들이 보였다. 우재 아버 님은 우리를 어떤마음으로 맞이하려 하셨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느껴졌다.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기재하진 않겠다..! 그치만 아름다운 마음인 건 확실했다.)
우재 아버님과의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긴장했던 마음과는달리 아버님은 유쾌하고 멋진 분이셨다. 무거운 이야기 속에서도 툭툭장난기를 발동하기도 하셨다.
이야기 중간중간 우리에게 밥을 해주고 싶다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진하게 남아있다. 팀원들이 점심을 먹고 팽목항에 가서 우재 아버님이많이 아쉬워 하셨다.
긴 시간 동안 우재 아버님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컨테이너를 나섰다.차에 탈 때까지 우재 아버님은 우리를 계속 배웅해 주셨다.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라탔다.
쎈 바람에 흔들려도 날아가지 않았던 팽목항의 노란 리본처럼, 우리를 위해손수 과일과 음료를 준비해 주시고 따뜻한 배웅을 해주신 우재아버님의 마음처럼, 노란 잎이 떨어져도 봄에는 새잎이 자라나는 기억의 숲 나무들처럼. 나는 이들처럼 기억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미금역에 하나둘, 모였다. 날씨가 좋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구름 많은 그런 날씨였다. 우중충한 날씨 아래로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희망들의 발자취를 따라걸으러 목포로 갔다. 얼마나 자고 일어나고를 반복했을까, 도착한 목포는 우릴전혀 반기고 있지 않았다. 금방 탈수해도 아무렇지 않을 듯한 뜨거운 공기와태양빛이 짓누르고 있었다.
간단한 안내를 받고 세월호 선체를 향해 다가갔다. 그 뜨거운 태양빛을 가릴만큼 세월호 선체는 굉장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선체와 가까워질수록 왠지 모를 소름이 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그 소름은 공허와 허무가 주는 서늘함이었다. 세월호 선체의 모습은 선 체가 바닷속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있었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조개껍데기와 녹슬어 구멍 난 부분들,색이 바랜 페인트와 글씨들. 말이 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나뿐만 아니라 팀원들대부분이 한동안 말 없이 바라만 보았다. 말을 안 한 게 아니라 실로 그 누구도 쉽사리 입을 뗄 수 없었다.
수많은 영혼과 영혼들이 살아온 시간, 영혼들과 함께 살아온 지금까지는살아있는 영혼들의 시간까지도 바다는 무심하게 세월호와 함께 삼켜버렸다.그런 세월호는 지금까지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많은 이들의 가슴에답답함과 분노, 슬픔만을 담아냈다. 그런 세월호를 우린 느낀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뭔가 세월호가 우릴 덮쳐 압도하고 있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난 어떻게든 많은 걸 느끼고, 많은 걸 내 눈을 통해 내 머리에 담으려 했다.그것이 역사 속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도 언젠가 내가 지금 느끼는감정과 사실들을 상기시켜 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입을 뗄 수없어서 침묵만 흘렀던 것은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팀원들 각자 세월호 선체와 함께 침몰한 많은 것들을 담아내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체를 보면 보고,느끼면 느낄수록 원초적인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해졌다.왜?! 도대체 왜?이 사건은 일어난 것인가? 의문은 다음 의문을 불러오고 점점 여러 의문이 가득해졌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모든 인터뷰를 하기 전에세월호 선체를 가장 먼저 촬영한 것은 충분한 의지와 동기를 실어 주어 주기부족함 없었다. 나는 이후 촬영인 인터뷰를 통해, 팀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의문들의 존재 이유와 이 사건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와 같은 가장 근본의 의문들을 해결할 이유를 선체를 보면서 찾았다.어쩌면 그날 목포의 날씨는 우리에게긴장감과 책임감을 느끼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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