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에서 올라오는 길에 4.16연대 자원활동가 카톡방이 울렸다. 서울시에서 광화문 기억공간 강제 철거를 위해 인력을 보냈다는(관련 발표를 한다며 모이게 해 놓고는, 뒤로는 광화문으로 트럭을 보냈다.) 연락이었다. 아무래도 각별한곳이었다. 처음 행동을 시작한 곳이자, 수많은사람들을 만나고 또 배웠던 곳.
나의 사춘기가 서려 있는 공간이었다.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돌아가며 피켓팅도 하고, 청와대 청원도 했는데. 7월 26일이 서울시가 고지한 철거시한이라는 이야길 듣고, 가방을 챙겨 서울로 갔다. 무슨 일이 안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 아빠한텐 그렇게이야기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정말 너무힘들 거 같아. 못 참을 거 같아.”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셨다.밤 9시에,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해보니 11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고, 극우 유튜버가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한쪽은 벽을 무너뜨리려, 다른 한쪽은 그걸 막아서고 있었다. 틈을 찾아 겨우 폴리스라인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깜깜했다.
빛이라곤 저기 밖 유튜버들이 쏘아대는 조명 뿐. 아마 찾아보면 내 모습도 찍혀 있지 않을까. 유튜브로 실시간 생중계를 하며 ‘저 사람들 좀 보라’며 조롱하고,감염병 예방법을 위반했다 며 잡아가라 소리를 질렀다. “왜 자냐”, “지금이 잘때냐”의 조롱 섞인 말들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말을 들었다.
그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었던 분은 노오란 머리를 하고 계신 순범 어머님이었다. “팬이에요.”라고 이야길 하니 어머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저기 가서 앉아 쉬자며 자리를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무수한 음료와 빵의 세례.... 계속 유족분들이 ‘자라, 자라....’ 하 셨지만 그날 밤 잠을 못잤던 건 아마 배불러서였을 거다.
그날과 다음날 광화문에서 주로 했던 일은 ‘유튜버와 기자 막기’였는 데, 찍어서 비난하고 조롱하는 유튜버들이 카메라를 들이밀 때 피켓으로 재빨리 막는 일이었다. 유족분들이 기자들이 마구 촬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야기하셨고, 활동가들이랑 같이 돌아가며 촬영하려는 기자들을 막았다. 확성기를 대고 소리치고벽을 무너뜨리려 하면 재빨리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처세술도 익혔다. 우재 아버님도 뵈었는데, “넌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냐. 옷 없냐?” 하시면서 얼음팩을 주셨다. 아, 진짜 더웠는데. 아, 츤데레의 정석이시다.
광화문 기억공간의 강제철거는 이뤄지지 않았다. 밤새 지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의원 몇명이 방문했었는데, 시의회 건물 안에 임시로 자리를 마련해주기로 했다. 광화문은 어쨌든 공사를 해야 하니. 광화문 기억공간 보존 투쟁은 그렇게 마무리됐고, 금요일 서울시의회 1 층으로 임시이전, 11월까지 운영되다 시의회 앞 자리를 마련해 건물 밖에 자리를 잡아 운영하고 있다.
아래의 글은 4.16재단에서 주최한 제1회 세월호 독서감상문 공모전에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를 읽고 쓴 글인데, 이날의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 돌아보니 뭐 이렇게 썼나 싶은데, 감사히도 장려상을 주셨다. 영화가 상영돼야 비로소 그 목적을 달성하듯, 글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함께 싣는다.

나는 나다.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서로가 될 수 없음에, 내 가 온전히 타인을 위한 삶을 살 수 없음이 때로는 참을 수 없게 고통스 럽다. 우리는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나. 아무리 공감하고 싶어도, 같이 느끼고 울어도 나는 결코 유가족이 될 수 없었다.
"저 사람들 저기서 내보내면 나도 나갈게. 아, 체포하시라고요." 확성기를 단 차 한 대가 기억공간 옆을 버티고 서서 무수한 말들을 내뱉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말. 말이 아닌 말. 경찰은 경고 방송을 했다. "차 빼세요. 차. 3회 경고 후 불응 시 강제 견인 조치 하겠습니다." 남자는 계속해서 확성기로 소리를 질렀다. 경찰도 따라 이야기했다. "3회 경고 불응 시 강제 견인 조치 하겠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확성기로 소리를 질렀다. 경찰도 따라 이야기했다. "3회 경고 불응 시 강제 견인 조치 하겠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확성기로 소리를 질렀다. 경찰도 따라 이야기했다. "3회 경고 불응 시 강제 견인 조치 하겠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확성기로 소리 질렀다. 경찰도 따라 이야기했다. ...폴리스 라인 안에서, 벽을 붙잡고, 간절히 간절히 바랐다. 제발 그만해 주세요. 유족분들이 고스란히 듣고 계시잖아요. 왜, 왜 그러는 거예요. 도대체 어떤 잘못을 했길래. 이 말들을 그저 듣고 있어야만 하는지. 그저 서울 시의 기억공간 일방적 철거에 슬퍼하고 반대하는 중이었다. 같이 있던 친구가 등을 토닥여 줬다. 가까스로 울음을 삼켰다.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아니 나갈게요. 나간다니까. 저기 저 사람들도 다 같이 연행하 시라고요." 경찰은 계속해서 따라 이야기했다. "3회 경고 불응 시 강제 견인 조치 하겠습니다." 다시 확성기 소리와 경찰의 경고 방송....
그렇게 잔인한 세상을, 아니 세상이 그렇게 잔인하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제대로 슬퍼할 수조차 없었다. 누군가는 무작정 카메라와 플래시를 디밀었다. 누군가는 돈 이야기부터 꺼냈다.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무작정 나섰던 길은 얼마 못 가 경찰들에 저지 당했었다. 사람들은 그만하자 했다. 이윽고 누군가는 시체팔이라며 조롱했다. 민중의 지팡이는 충돌을 막을 뿐이었다. 상처받은 이들을 보호 해주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을 살았고, 몰랐고, 지나쳤다. 그 수많은 순간을. 유가족분들은 홀로. 무수한 모욕과 비난을. 맞아왔고 버티고 있었다. 이미 세상은 자식을 앗아간 끔찍한 세상이었고,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그 하루를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울어버린 나를, 어머님과 아버님들이 안아주고 달래 주셨었다. 나는 그 삶을 바라봐 왔었다. 기사를 통해 접하고 영상을 통해 보며, 여기 있는 나와 저기 있는 사람들. 고된 삶, 좌절스러운 상황. 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나 살기도 바빴었다. 시연 어머님 말씀이 맞다. '그 사람들은 내일이라도 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인데 우리는 아니잖아요.' 나는 언제든 하기 싫으면 그만둘 수 있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하고 울어도 그 마음을 미처 다 알 수 없다.
세상이 잔인한 건 내가 온전히 그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잘 모르기때문에. 남이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말하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서서 충돌만막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의 죽음은 슬프지만 내 죽음이 아니었기에.
누군가는 죽었어도 나는 삶을 살아가야 했기에.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결코 겪기 전까지 그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연대 활동가여란님과 그런 이야길 했다. '이 책만 읽어도 사람들이 그런 말은 안 할 텐데요.' 세상은 생각보다 더 잔인 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순범 어머님께 물었다. 어떻게 안 우실 수 있냐고. 저 소리들을 어떻게 가만히 듣고 계시냐고. 가만히 토닥여 주시다가, 휴지와 물을 주시면서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하셨다. "더 많은 것들 더 무수한 것들도 겪어 봤어. 나는 안 울 거야. 언제 울 거냐면, 안전한 세상이 됐을 때. 다시는 이런 참사가 안 일어날 때. 그때까지 안 울었다가 그때 다 울 거야." 그리고 우연히 본 영상에서 울고 계신 모습을 봤다. 가만히 쭈그려 앉으셔서 조용히,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웬만한 일에는 눈물이 안 날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리셨던 거다. '눈물이 마르도록.' 강해졌다고 표현하고 싶지 않다. 강해진 게 아니다. 잔인한 세상이 눈물길을 막 아 버렸다. 세상은 이미 자식을 앗아간, 끔찍이도 잔인한 세상이었다. 나는 그걸 미처 다 알지 못했다.

누구는 내게 세상은 원래 그렇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산다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어디선가 그랬다. 그런 순응이 세상을 더 잔인하게 한다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홀로 내버려 둔다고. 자신은 포기했다며 괴로워하는 씨랜드 참사 유가족에게 예은 아버님은 이야기한다.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때 누군가 와 주었다면 좀 더 버티지 않았겠습니까."
누군가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내일의 세상은 오늘보다 조금 덜 잔인하면 좋겠다. 어머님들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댔다. 일어나선 안 된다고. 다른 사람들은 이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을 마주했다. 이틀간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냈던 사람들. 집에 돌아가는 길, 등과 어깨를 맞대고 서서 쓰러지지 않도록 틈틈이 서 있는 사람들. 이렇게, 서로가 맞대어 서서 어깨를 내어주고, 포기하지 않도록 쓰러지지 않도록. 아파하는 누군가를 내버려 둔 채 나만의 삶을 살아가지는 않길.
홀로 남아 있는 그곳에서 유가족은 다른 이에게만은 부디 이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해결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와 같은 아픔을 더이상 다른 사람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거예요. 웃을 때도 있겠지만 평생을 울어야 돼요. 그 쓰리고 가슴 아픈 일을 또다른 누군가도 겪어야 하나요? 그러지 말자 이거죠. 우리가 “같이 해주세요”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같이 해야 하는데 덕을 드러내지 못한 교회들, 보듬어주지 않는 사람들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해요. 우리와 같은 아픔을 더이상 다른 사람은 겪지 않게 해달라고. 사람들에게 골고루 제대로 된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