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다큐멘터리를 편집해오면서, 다들 진로 준비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혼자 뒤쳐져서 나아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불안했습니다. 내가 너무 미련을 못 버리고 이미 어쩔 수 없이 끝나버린 일에 매달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요. 그런  저를 잡아주었던 생각이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며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계속해서 돌아보고 반추하면서 그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왔던 이야기를, 의미들을 발견해서 이야기로 해내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고요.
촬영이 끝나고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망했다’는 비관이고 ‘그래도 잘했다’는 낙관이고,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건 ‘그래도 해 보자.’ 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다큐멘터리를 공부하면서 얻었던 배움이자, 또 거리에서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는, 욕설과 비아냥에도 물러나지 않는 유가족분들의 모습을 지켜봤던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이어져 ‘지난 시간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고2때 시작한 프로젝트를 졸업하고도 마무리하지 못한 저에게, 그리고  졸업했던 고등학교가 마냥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는 제게 특히 더 중요한 고민이이었습니다. 걸어온 궤적이 오늘의 나를 보여준다는데, 후회와 냉소보다는 그 안에서 제일로 좋은 것들을,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 이야기해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2014년 4월 16일을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즈음의 일들은 기억에 오래 남아 있지만, 날짜와 시점, 시간들이 선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이야기한 친구들도 많이 헷갈려 했습니다. 많은 어른들은 아직도 그날이 선명하고 생생하다는데 우리에게는 왜 그렇지 못할까요. 안타깝지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점점 많아질 것 같습니다. 2014년 이후에 태어난 친구들이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고, 앞으로는 점점 더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줄어들게 되지는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작업은 제게 중요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는 이 친구들이 이 과정에서 무엇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을까. 그건 저희의 배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월호 참사를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아이들이, 이 참사를 왜 계속 기억해야 하는지를 같이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봤습니다.

혐오가 너무 많아졌다는걸, 자주 체감합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에게 이렇게 냉랭했던 것일까요. 저는 슬픔이 큰 힘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거짓이 없고, 가볍지도 않습니다. 다시 우리가 서로를 위해 울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잘 사는 게 제일로 먼저인 세상에서, 타인의 아픔을 보고 함께 슬퍼할 수 있다면, 공감할 수 있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함께 슬픔을 느낀 우리는 다른 변화들도 하나둘씩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다시 우리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친구가 인터뷰를 하며 ‘다들 똑바로 살면 좋겠다.’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제 다짐 삼아 이 말을 영화에 넣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나는, 허투루 살지 않겠다고. 똑바로, 잘 살겠다고요. 다큐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작가기록단으로 활동하며 <금요일엔 돌아오렴>, <다시 봄이 올 거예요>,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를 함께 만드신 미류님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 그런 이야길 해주셨습니다. 기억은 명사가 아니라 기억하다, 라는 동사라고. 참사 이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기억이라고요. 우리가 잊으면, 그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른 세계를 살아가게 될 거라고.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그래서, 적극적으로 ‘우리’가 ‘함께’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노력하며 살겠다는 저의 다짐입니다. 아 그리고 그 친구는 학교 다니는 동안 정말 많이 힘들어 했는데요, ‘학교에서 힘들었던 이유가, 진심인 척 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던 것 같아. 뭐 하는 시늉. 정말 진심이라면 그렇게 행동하진 않을 것 같은데. (…) 정말 마음이랑 정성을 다해야지. 왜냐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내가 되면 곤란하니까.’ 저 스스로가 미워지지 않도록, 열심히 잘 살아가겠다는 저의 다짐을 담았습니다.

유가족 부모님을 비롯해 형제자매들, 생존자를 향한 위로를 건네고 싶었습니다. 제가 계속 여기 버티어 서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게요. ‘잘 지내시나요?’ 하는 안부 인사에는 잘 지내셨기를 바란다는 다정한 속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안부를 묻습니다. 같이, 계속 기억하겠습니다.

가장 마지막 인터뷰였다. 대중교통으로 가기가 쉽지 않아, 학교 끝나고삼삼오오 모여 택시 두 대를 잡아타고 출발했다. 가는 길에 조용한 택시 안에서, 곤히 잠든 친구 너머로 한강의 야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던 것이 생각난다.
미류작가님과의 인터뷰는 내가 다큐 촬영 중 가장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가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건은 발생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하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연히 우리는 이를 잊어버리므로 기억은 그 사람들과 함께 가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모든 도덕은 사실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내게 세월호는 일말의 책임감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11살의 내가 왜 세월호 사건에 책임 의식을 느끼는지 나조차도 궁금했었다. 이제는 그것이 역설적으로 망각이라는 자연스러움을 거슬러, 모두의 시간이 함께 흘러가는 지극히 평범한 자연스러움에 도달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안다. 언젠가 그 자연스러움을 마주하는 날을 계속해서 꿈꾸게 된다.

사전미팅 때부터 김성묵 님을 찾아뵙는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섭외를 맡았던 분이어서, 그래서 더 전부터 대화를 나누어서인지는 몰라도편치 않은 마음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른 인터뷰들을 진행해왔다는 뜻이 아니다. 세월호에서 마지막으로 생존하신 분. 그 배에서 마지막으로 나오셨을 분을 만나는 길이어서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다.
김성묵 님의 인터뷰에는 분노가 있었다. 짜증이나 화처럼 사사롭고 가벼운 그런 것 말고 분노가 있었다. 그간 진상규명 하나를 위해 해오신 일이 모두 헛짓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 사실은 안타까움, 비통함, 누군가를 향한 화, 결국 다시 분노가 있었다. 김성묵 님의 삶은 무지 쉽지 않은 삶같아 보였다. 쉽지 않은 삶...”죽지 못해 살아내는 살인자입니다”라는 김성묵 님의 페이스북 소개 글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을 인터뷰에서 확실히 느꼈다.

촬영장소는 방송국이었다. 현장 체험학습까지 내고 갔었던 촬영이었고, 무거운 장비들을 이고 먼 길을 떠나야 했기에, 도착했을 때 모두 지쳐있었다.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방송국 로비 구석에서 어수선하게 서 있더니, PD님께서 우리를 맞이해주시러 내려오셨다. 둥그렇고 넓적 한 모자와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입으신 모습이 인터넷에서 보시던 모습과 똑같아 한눈에 알아뵐 수 있었다.
스튜디오에 들어서서 인터뷰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세팅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대화'를 이끌어주셨고, 인터뷰할 때도 부족한 질문이었지만 말씀마다 신중하게 신경 써주시면서 답변해주셨다. 질문을 받고 대답을 생각해내신 거라기보다는, 이런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평소에 본인이 생각하시던 견해와 겪으셨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대화하시는 방식도 듣는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게 해주는 힘이 있으신 것 같았고, 인터뷰를 모두 끝마치고 돌아보았을 때, 질문자와 답변자가 정해져 있 었던 게 아닌,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느껴졌다.질문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우리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을, 그리고 어떨 때는 역으로 질문을 하시기도 하시며 이동하느라 힘들었던 사실이 무색해지게 의미깊은 순간이 되었고, 질문하는 입장이었음에도 나 역시 많은 생각이 들게 되었던 시간이었다. 인터뷰가 마무리되고도 꼭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건네주셨다. 꼭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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